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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 죽굴도
설교자로서 1990년부터 3년간 일주일에 한 번 등대섬을 여행한 경험이 있다. 섬은 여러 섬의 상황을 보면서 섬의 실정을 기록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때 만난 이들은 김경림 김동철 할아버지 등이었다. 당시 노화읍 이목리에서 후장구도, 서방도, 죽굴도, 제원도, 대장구, 어룡도 등을 거쳐 하루에 한 번씩 마산호라는 여객선이 임옥항에 입항했다.
죽굴도를 거쳐 출발지인 이목항까지 돌아오는 데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이 25년 이상 전에 후퇴한 것 같다. 사람들이 떠나고 섬은 더욱 황폐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배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섬사랑호의 항로가 해초와 전복 양식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굴도에서 전복, 꽹과리, 해초 등 해산물을 채취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섬에서 살고 있다.
죽굴도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섬 주변에 어패류와 전복 등이 풍부하고, 해조류 양식장 부지를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 살기 좋았다. 특히 도미의 낚시가 잘돼 어선들이 섬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주변 톳s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돼 60㎏에 20만원 안팎에 팔렸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자연석을 채취해 나눠 바위에 말렸다.
톳 스타일과 함께 여름철에는 밤에 발전기로 불을 밝히고 멸치가 잡혔다. 생활권은 노화읍과 해남으로 배가 부두가 없는 곳에 간신히 닿으면 주민들이 지게를 지고 생필품을 나른다. 농사짓는 것은 보릿고개가 소량일 뿐 정원과도 같다. 해변이나 섬의 모든 사람들은 태풍이나 폭풍우 때 많은 고통을 겪는다.
죽굴도는 수심이 깊어 제대로 된 방파제를 만들 수 없다. 군이 만든 방파제는 파도에 자주 끊긴다. 2013년 방문했을 때는 믿음직스럽고 큰 방파제였지만 앞부분은 파도에 의해 5m가 잘려나갔다. 죽굴도의 역사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 하박나무의 '할머니'는 마을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매년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의식을 치르곤 했지만,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